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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아온, 동네

[역사] 사실 속의 우리동네 (86) 中林洞(중림동)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이런 걸 검색했다. 이거이거, 은근 재밌는 걸~ ^^)




동아일보 | 1976.03.05 기사(기획/연재)

 

中林洞(중림동)

李朝(이조) 때 名臣(명신)들의 宅地(택지) … 藥田(약전)으로도 有名(유명)

 

서부서울역앞 고가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萬里洞(만리동)고개로 넘어가는 큰길과 서대문방향으로 가는 길 사이에 阿峴(아현)삼거리고 넘어가는 길이 뚫려있다.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의 좁은 이 언덕길이 옛날약고개(藥峴(약현))로 지금 중림동의 한복판이다.

중림동이란 동 이름은 1914년 京城府(경성부)를 1백86개 동으로 구분할 때 붙여졌다. 이 동네는 원래 西部(서부) 盤石坊禾廛下契(반석방화전하계)의 翰林洞(한림동)과 藥田契(약전계)의 中洞(중동), 그리고 盤松坊車子里契(반송방차자리계)의 兄弟井(형제정)이었다가 藥田中洞(약전중동)과 翰林洞(한림동)으로 되었고 두 개 동 중 한자씩 올따 中林洞(중림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옛날 이 일대는 넓게 약밭이 있어 장안에 약을 공급해왔는데 한복판을 중동, 위쪽은 약전상동, 아래쪽은 약전하동이라 했고 가운데를 뚫는 고갯길이 藥田峴(약전현)(혹은 약현)이라 해왔다.

 

이 일대는 또한 주택지로 이름이 높아 名臣(명신)이 많이 살던 곳이기도 했다.

 

한림동은 이조 선조 때 명신으로 요직을 거쳤던 이정암 정형 정* 삼형제가 모두 한림 벼슬을 지내 그들이 살던 곳을 한림동이라 하게 되었다고 東國餘地備考(동국여지비고)에 적혀 있다.

 

또 이조 세종 때에 나서 예조판서까지 지낸 성현의의 집도 바로 약전현에 있었다 한다. 성현의 집은 이태조에게 한양(서울) 도읍을 일러주었다는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주었다 한다. 성현의 집과 관련,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하룻밤 성현이 홀로 뒷동산에 올라 시를 낭송하는데 성현의 집에 놀러왔던 손님이 새벽 닭 우는 소리에 깨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성밖으로 내다보니 신선이 내려온 것 같아 황망히 달려나갔다가 주인과 손이 서로 알아보고 크게 웃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성현의 집이 명당이었다는 이야기인 듯하며 그래서 그런지 이 일대에는 주택이 일찍부터 많이 들어섰다 한다.

 

또 이곳에는 장안에 모두 5개소인 싸전(쌀가게) 중 하나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중림동은 동족에 의주로2가 봉래동2가와 접하고 남쪽으로 만리동12가가 있으며 서쪽은 충정로3가 북쪽은 합동 의주로2가가 경계하고 있다.

 

55년 지방자치법 실시로 독립된 동사무소가 약고개 중턱에 설치되었다.

 

옛 약고개의 모습은 이제 찾을 길 없고 다만 이웃 충정로3가에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고약」 본포가 있을 뿐이다.

 

광복 후 46년 서울의 왜식동명을 고칠 때도 중림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지녔던 이 조용한 주택가는 작년 10월 1일 서울시의 관할구역 조정 때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옮겨 소의문 밖 서부변방에서 어느새 서울의 중심부가 되어버렸다.


[사진 설명] 중림동사무소 앞에서 아현삼거리로 넘어가는 이 길은 옛날 약고개로 유명했다.